찻잔 속의 태풍

얼마 전, 오랜만에 고등학교 사진 써클 동기들을 만나 저녁을 같이했다. 졸업장을 받고 각자의 길을 걸은 지 십수 년. 나 같은 평범한 월급쟁이가 있는가 하면 장사를 해서 큰돈을 번 친구, 정치판에 뛰어든 친구, 여전히 학교에 남아 있는 친구, 유산 덕분에 놀고먹는 친구, 군대에 말뚝을 박은 친구, 사진을 계속해서 광고 사진을 하는 친구, 사이판으로 이민 간 뒤 10년 만에 얼굴을 내민 친구 등 살아온 햇수만큼 서로 다른 인생을 일궈가는 친구들이다.

술잔이 오가고 학창 시절의 추억을 곱씹는 시간이 지나자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어른스러워졌다. 주식과 아파트, 그리고 재테크, 직장과 사업의 고단함에 대한 푸념, 아이들 육아와 교육에 대한 걱정, 자동차, 대선, 그리고 빠지지 않는 여자 연예인 이야기. 서로 풀어놓은 이야기 보따리가 한가운데 수북이 쌓일 무렵, 한 가지 외로운 사실을 발견하곤 속으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지만 정작 IT 업계에 몸을 담은 이는 나 혼자뿐. 첫 직장 이후 대부분의 직장이 IT 업계에 속해있던 나와는 달리 친구들 대부분은 IT와 무관하다.

블로그는 커녕 싸이 미니 홈피를 가지고 있는 친구조차 손에 꼽을 정도고, 컴퓨터를 켜면 곧바로 포털 연예 정보나 클릭하며, 정보 기기라고 해봐야 주머니 속의 휴대폰과 차 안에 놓인 카-내비게이션이 전부인 친구들. 태터툴즈니 올블로그니 애드센스니 윈도 비스타니 맥 OS X이니 죄다 딴 세상에서 건너온 단어일 뿐이다. 얼마 전에 경품으로 받은 PMP로 미국 드라마 ‘히어로즈’를 챙겨 본다는 그래픽 디자이너 친구의 말이 반가울 정도.

이렇게 오프라인에 나와 있으면, 하루 24시간 중 16시간을 인터넷에 접속해 있는 나의 생활이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사람은 여전히 아톰의 공간 속에 살거늘 보이지도 않는 비트에 얽매여 사는 나의 일과 삶은 허공을 떠도는 먼지만도 못한 것인가? 술잔을 응시하며 한참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내게 친구들이 말을 건넨다.

“어이 파인애플! 집에 PC는 애들이 차지해서 한 대 더 사고 싶은데, 어떤 게 괜찮아? 요즘 노트북 PC가 엄청 싸졌던데? 추천 좀 해줘 봐.”
“삼X 휴대폰 좀 싸게 살 수 없냐? DMB 되는걸로. 회사가 용산에 있냐?”
“인터넷은 매가X스가 좋냐? 파X콤이 좋냐? 하나X 쓰는데 느려터져서 바꿀 때가 된 거 같아. 위약금도 대신 물어 준다며?”
” ……………… ”

그래 인정한다. 보통 사람들에게 IT의 효용이란 느린 컴퓨터를 교체하고 반짝이는 새 휴대폰을 장만하고 온라인 고스톱을 치기 위해 싸고 빠른 인터넷 회선을 집에 까는 거다. IT 코리아니, 블로그가 세상을 바꾼다느니 아무리 떠들어 봤자 찻잔 속의 태풍일 뿐. 50인치 벽걸이 TV를 자랑하고 스팀이 나오는 드럼 세탁기에 감탄하고 새로 뽑은 중형 자동차가 더 사랑스러운 그런 세상에 나 혼자 똑똑한 척, 앞선 척 했던 것일 뿐. 배 나오는 노가다가 IT 거늘. 무슨 첨단이고 변혁인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방금 술잔을 나누었던 친구에게서 날아온 문자가 나를 확인사살한다.
“요즘 영화 어디서 다운받냐? 공유 좀 해주라”

아놔 … T-T

찻잔 속의 태풍”에 대한 4개의 생각

  1. Caleb

    전 IT쪽 공부를 하는건 아니지만..
    항상 주변 사람들 중에 컴퓨터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아는 사람 취급을 받아왔었던 사람으로써..
    상당히 공감이 가는 말씀들입니다..
    저 역시.. 뭐랄까요..
    마음이 조금 그렇네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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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onoca

    동감합니다.
    저는 20대 초에 문화적인 좌절을 겪은 적이 있었죠. 고교동기들이 대부분 기계과나 전자과를 가서 학교의 수업에 대한 이야기에 어느 정도의 공감대가 있었던 반면, 화학재료쪽을 전공한 저는 학교 수업 이야기만 나오면 할 말이 없어졌고, 그게 점점 심해지더군요.
    대부분의 사람들과 취미가 다소 다른지라 지금 직장에 들어와서 겪는 차이란 것도 참 그렇습니다. 대부분 프로페셔널한 취미보다는 평이한 수준의 취미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직까지는 많은 것 같아요. 어릴적 부터 프로페셔널한 취미만을 고집해왔던 저에게는 오히려 제가 해 왔던 일련의 취미작업들이 가끔은 덧없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뭣보다 그런 것에서 말이 통하지 않을 때가 제일 답답합니다;;; 선택의 폭을 넓히는 수 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네요. 할 것도 아직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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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qbio

    신기하게도 정말 친한 친구들을 만나면 인터넷, 컴퓨터, 각종 디지털 기기들에 대한 이야기들의 비중이 확연하게 줄어듭니다. 오히려, 아주 소소하고 간단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서로 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은 듯 합니다. 나중에 생각하면 별건 아니지만, 뭐가 그리 신났는지 서로 희희덕거리는 경우도 많고.

    그래도 아직까지는 다른 이야기의 소재를 가지고 오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이야기의 소재가 되는 듯 하니 이렇게나마 버틸 수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나저나, 저도 한때는 나름대로 이것저것 알아야지 직성이 풀리곤 했는데, 요즘엔 저도 모르게 후배들에게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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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가즈랑

    저도 조금씩 FineApple님과 같은 마음을 느끼게 될 듯합니다. 제 주변에서는 매킨토시와 웹 이쪽 이야기를 꺼내기가 미안할 정도로 컴퓨팅 세계에 가볍게 발을 들여놓은 친구들이 많아서요.

    그래도 친구들에게도 그들만이 알고 있는 그런 세계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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