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는 점점 복잡해 집니다. 어쩔 수 없지만 …

며칠 전 내린 비 때문에 차가 많이 더러워졌습니다. 무료 쿠폰도 있겠다 세차나 할 겸해서 근처 주유소로 향했습니다. 자동 세차 터널에 차가 들어선 순간 ‘어! 이 장면 찍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얼른 뒷좌석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들고 겨누어 보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차가 자동 세차 터널을 지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이것저것 시간을 지체할 수 없을 것 같아 초점과 노출은 카메라에 맡기고 구도만 대충 맞춘 후 셔터를 눌렀죠. 디지털 카메라는 촬영 직후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어서 편리합니다. 그러나 …

초점과 노출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았더군요. 당연합니다. 자동 세차기 터널 안의 노출 상황은 카메라의 분할 측광 알고리즘이 감당하기에는 그리 만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초점 역시 차창 유리에 맞춰야 할지 차창 밖 풍경에 맞춰야할지 카메라 스스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럼 그렇지 …’라는 말 한 마디를 내뱉고는 재빨리 카메라의 세팅을 바꾸었습니다. 노출은 프로그램 모드에서 매뉴얼 모드로, 측광은 분할 측광 모드에서 중앙중점 측광 모드로, 초점은 창유리에 맞추되 조리개를 조금 조여서 배경이 너무 날아가지 않게 했습니다. ISO 감도를 높여도 셔터 속도가 낮았으므로 의자에 깊숙이 눌러앉아 최대한 흔들리지 않게 자세를 잡고는 셔터를 눌렀습니다. 셔터 속도를 바꾸어 가면서 몇 단계 브라케팅을 하고 나니 어느새 차는 세차 터널을 지나 있더군요.

컴퓨터 앞에서 찍은 사진을 하나씩 살펴 보면서, 새로 장만한 디지털 카메라의 세팅을 어떻게 해놓나 … 고민에 빠졌습니다. 펜탁스에서 출시한 최신형 디지털 카메라지만, 최신형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진 찍는 과정을 간편하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디지털이기 때문에 결과물의 촬영 여부를 즉시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을 얻는 대신에 사진가는 적지 않은 혼란 속에서 여러 가지 의사결정을 해야 합니다.

손가락과 눈에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의 AF를 할 건지 즉, 원 샷 모드로 할 건지 컨티뉴어스 모드로 할 건지. 게다가 AF 측거점도 결정해야 합니다. 카메라가 제시하는 11개의 측거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왜 11개씩이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중 하나를 선택하랍니다. 여기에 AF-Lock과 AE-Lock 기능도 추가됩니다. 각기 상황에 따라 이들 기능을 단독으로 쓸지 조합해서 쓸지, 조합한다면 어떤 식으로 조합해서 쓸지를 미리 결정해 줘야 합니다.

측광 방식도 다양합니다. 분할 측광에 맡길건지, 전통적인 중앙중점 측광에 의존할 건지, 또는 스팟 측광을 써야할 땐지 말입니다. 중앙중점 측광과 스팟 측광을 이용하면 내 경험과 노출계의 지시를 종합하여 필요한 노출치를 나름대로 도출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할측광은 그 알고리즘을 사진가가 이해하기 힘듭니다. 따라서 노출 보정을 도대체 어떨 때 얼마만큼 해줘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합니다. 그리고 일관적이지도 않습니다. 노출 단계도 있습니다. 1/2단계로 할지 1/3단계로 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이즈음 측광과 AF가 만나면서 또 하나의 기능이 등장합니다. 바로 AF 측거점 연동 노출이란 거죠. 슬슬 짜증이 나지만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화이트밸런스를 맞춰야 합니다. 필름 시절에는 해보지 않았던 경험입니다. 언제 어떤 모드에 놓아야 할지 헛갈립니다. 그렇다고 매번 화이트밸런스를 수동으로 지정해 줄 수도 없습니다. 화이트밸런스 결정에 자신이 없을 때면 RAW 촬영을 합니다. 귀찮습니다. 감도도 맞춰야 합니다. 필름 때는 손각대의 저력을 믿는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조금만 셔터 스피드가 떨어지면 ISO 조절 버튼을 클릭합니다. 분명 편리한 혜택이지만 덕분에 조작해야 할 세팅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이 외에도 많습니다. 해상도 및 압축률 설정, 색공간 설정, 화상톤 설정, 선명도/채도/컨트라스트 설정 …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능을 어떻게 할건지 결정해야 합니다. 심지어 초점이 맞았을 때 ‘삑-‘ 소리를 낼 건지 말 건지도 결정해야 합니다.

한 때는 카메라 메커니즘에 대해 일가견이 있다는 소릴 들었지만, 그게 다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 이런 기능 설정이 점점 낯설어 집니다. 인터넷에 접속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들어 봅니다. 더러는 도움이 되지만 대개는 쓸모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얼마나 다양하고 강력한 기능들이 포함되어 있느냐에 따라 카메라의 서열을 매깁니다. 역시 더러는 긍정하지만 대개 동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혼란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되려 혼란만 가중됩니다.

결국, 반쯤 고장이 난 옛날 카메라, P50을 다시 꺼내 놓았습니다. 더 이상 쓰지 않는 카메라지만 익숙한 카메라기 때문에 P50과 비슷한 세팅이라면 혼란이 줄어들 것 같기 때문입니다. 초점은? 매뉴얼 혹은 원 샷 모드로. 측거점은? 가운데 중앙 측거점으로. 노출은? 메뉴얼 혹은 조리개 우선으로. 측광은? 중앙중점 측광으로. 노출 단계는? 1/2단계로. AE-Lock은? 연동하지 않고 별도 버튼으로만 … 등등 그래도 결정해 줘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았지만, 나머지는 디지털 관련 부분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당장 촬영에 긴급한 설정들은 그래도 많이 명확해 졌습니다.

집안에서 뒹구는 아이와 TV 연속극에 빠져 있는 아내를 대상으로 몇 컷 셔터를 날려 보았습니다. 한결 편합니다. 옛사람들이 그랬지요. 구관이 명관이라고. ^^ 낡은 P50을 다시 쳐다보며 ‘이걸 수리해 말아?’라고 잠시 되뇌어 보지만, 이내 귀차니즘의 압박으로 다시 상자 깊숙이 넣어 둡니다. 수리하느니 비슷한 중고 카메라를 새로 사는 게 더 싸게 먹힐 겁니다. 다시 고친다 하더라도 이미 디지털의 편리함(?)에 젖어 버린 지 오랜 터라 다시 암실 작업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스캔 작업을 할 바에야 디지털이 낫습니다. 결국, 시간과 공간, 심적 여유 … 모두 허락지 않는다는 핑계입니다.

사진은 그저 사진일 뿐이지만, 도구는 세월이 지남에 따라 계속 바뀌어 갑니다. 적당히 그런 추세에 적응을 해야 할 텐데도 자꾸만 고개는 뒤로 돌아갑니다. 이놈의 라이카 M은 예나 지금이나 허리가 휠 정도로 비쌉니다. 어쩌면 그렇게 비싼 게 다행일는지도 모르죠. 내가 찍는 사진은 점점 단순하고 단조로워지지만, 카메라는 점점 복잡해 집니다. 필요하다면 익숙해져야겠지요. 모든 게 나의 귀차니즘 때문일 겁니다.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 그래도 가끔 짜증이 날 때가 있습니다. 그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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